정체성과 고민을 꺼낼 수 있는 서점, 연남동 ‘책방 사춘기’
서울 마포구 연남동의 좁은 골목을 걷다 보면 다른 공간과는 분명하게 다른 기운을 풍기는 조그만 책방이 있다.
이곳은 ‘책방 사춘기’라는 이름을 가진 독립서점으로, 단순히 책을 판매하는 공간이 아니다. 이 서점은 누군가의 고민이, 정체성이, 질문이 자연스럽게 놓일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 이름처럼, ‘사춘기’는 혼란스럽고 불완전하며, 동시에 감정이 예민하게 깨어 있는 시기를 상징한다. 책방 사춘기는 그 감정들을 억누르지 않고, 오히려 말해도 되는 장소로서 기능한다.
이 서점은 청소년 뿐만 아니라, 삶의 전환기나 자기 정체성을 탐색하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 운영자 역시 청소년 출판과 교육 활동에 깊이 관여해온 사람으로, 공간 전체에 그런 배려의 감수성이 스며 있다.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서점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책방 사춘기는 다소 낯설고 섬세하게 구성된 서가와, 고민을 건드리는 질문 중심의 책 큐레이션을 통해 깊이 있는 독서 경험을 제안한다. 기존과 다른 새로운 독서 경험을 바라는 사람이라면 이 곳에 가보기를 추천한다. 지금부터 이 공간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무엇을 지향하며, 왜 지금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서점인지를 자세히 살펴본다.
청소년의 시선을 반영한 독립 큐레이션
책방 사춘기의 가장 뚜렷한 정체성은 ‘청소년 중심 서점’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말하는 청소년은 단지 나이로만 정의되지 않는다. 자기 감정에 솔직하고, 기존 질서에 질문을 던지며, 다양한 존재 방식에 대해 탐색하는 모두가 이곳에서 말하는 ‘사춘기’의 대상이다.
서점의 서가에는 청소년 문학, 성장 소설, 십대의 감정을 다룬 에세이들이 주를 이룬다. 그러나 이 책들은 단순한 ‘청소년용 도서’가 아니다. 『소년이 온다』, 『페미니즘의 도전』,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퀴어는 당신 옆에 있다』 같은 도서들이 함께 놓여 있으며, 이 모두는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라는 기준 아래 선별되었다.
책을 분류하는 방식도 일반 서점과는 다르다. 이 서점에서는 ‘장르’보다는 ‘질문’으로 책을 묶는다. 예를 들어, ‘나는 누구인가?’, ‘관계는 왜 이렇게 어려울까?’, ‘사랑이란 무엇인가?’ 같은 질문 아래 책들이 놓인다. 이는 방문자가 책을 ‘소비’하기보다는 ‘탐색’하도록 이끄는 방식이다.
질문이 머무는 공간, 비구매자도 환영하는 서점
책방 사춘기는 책을 사지 않아도 괜찮은 서점이다. 운영자는 “서점은 책을 통해 자신에게 질문하는 공간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는 한참 동안 책을 들여다보고, 생각에 잠기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책장을 넘기다 나가고, 또 어떤 사람은 책 한 권 없이 30분을 머물다 간다. 하지만 그 누구도 불편한 시선을 받지 않는다.
서점 한쪽에는 책을 읽을 수 있는 소파와 작은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다. 커피나 음료는 판매하지 않지만, 공간 자체가 카페처럼 조용하고 편안하다. 벽면에는 방문자들이 남긴 짧은 메모가 붙어 있고, 어떤 메모는 “내가 처음으로 울어도 된다고 느낀 공간”이라고 적혀 있다.
이 서점은 ‘비판받지 않고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장소’를 지향한다. 청소년뿐만 아니라 성인 방문자도 많고, 특히 자아를 탐색 중인 20~30대 여성, 비성소수자, 창작자들이 이 공간에서 마음의 쉼을 얻는 경우가 많다. 독립서점이 단지 책을 파는 공간이 아니라, 감정을 받아주는 ‘문장적 장소’가 될 수 있음을 책방 사춘기는 증명하고 있다.
다양성과 소수자 중심의 책 큐레이션
책방 사춘기의 또 다른 정체성은 퀴어, 페미니즘, 젠더 다양성을 존중하는 책 큐레이션이다. 서점은 특정 주제에 편중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사회적으로 배제되거나 주변화된 존재들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나의 성소수자 청소년에게』,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같은 책들이 특정 코너에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 서가에 자연스럽게 배치되어 있다. 이는 다양성이 ‘별도의 특수 주제’가 아니라, 모든 이야기 안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서점의 철학을 반영한다.
운영자는 “소수자 책이라고 해서 별도 진열을 하거나 특수화하면 오히려 또 다른 배제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곳의 큐레이션은 섬세하고 일상적이며, 누구나 자연스럽게 이런 책들과 마주칠 수 있도록 구성된다.
책방 사춘기의 이러한 큐레이션 전략은 청소년뿐만 아니라, 정체성과 삶에 대해 복잡한 고민을 안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의미 있는 책 선택지를 제공한다.
책방이 커뮤니티가 되는 순간들
책방 사춘기는 간헐적으로 소규모 북토크, 작가와의 대화, 글쓰기 모임 등을 연다. 그러나 이 행사는 누구나 참여 가능한 공개 행사라기보다는, 소수의 사람들이 깊이 있게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예를 들어, 자서전 쓰기 워크숍, 성평등 독서 모임, 10대의 마음 쓰기 모임 등이 서점 내부에서 비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다. 홍보는 대부분 입소문이나 서점 내부 안내문을 통해 이루어진다. 외부 노출보다, 실제 방문자와의 관계 맺음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런 커뮤니티 활동은 독자에게 단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을 통해 타인과 연결되는 경험을 제공한다. 특히 “말해도 괜찮다”는 공간의 철학은, 참여자들에게 감정을 솔직히 꺼내고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심어준다.
책방 사춘기는 단순한 독립서점을 넘어, 말할 수 없던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작은 커뮤니티로 확장되고 있다. 이처럼 독립서점이 하나의 감정 플랫폼이 될 수 있다는 점은 매우 인상적이며, 독자와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는 데 큰 힘이 된다.
책방 사춘기는 서울 연남동의 작은 골목 안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독자와 관계를 맺고 있는 서점이다. 이곳은 단순한 책 판매 공간이 아니라, 질문과 감정, 정체성이 머물 수 있는 열린 장소다. 청소년이라는 이름 아래 누구나 자기 자신을 찾아가고, 소외되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는 이 공간은 단순한 독립서점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