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세상의 진실을 말해주는 가장 조용한 목소리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언제나 평등하게 들리지 않았다. 다수의 서사 뒤에 가려진 소수자의 이야기들은 오랫동안 ‘읽히지 않는 문장’으로 남아 있었다. 특히 퀴어, 페미니즘, 장애와 같은 주제는 오랜 시간 대형 출판 시장이나 공공 도서관에서 소외된 채 주변부로 밀려나 있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한국의 독립 서점은 이 침묵의 틈을 뚫고 나와 그 목소리에 집중하는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다. 책방지기의 철학과 사회적 관심이 반영된 큐레이션, 누구나 편히 들어와 앉아 책을 고를 수 있는 구조, 그리고 책을 통해 새로운 연결이 이뤄지는 이 책방들은 이제 단순한 책 판매 공간을 넘어서, 사회적 다양성과 감수성을 경험하는 하나의 플랫폼으로 자리 잡고 있다. 다양성의 이야기는 결코 소수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소수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보다 평등하고 다양한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다.
지금 소개할 서점들은, 우리 모두가 읽어야 할 이야기들을 말없이 들려주는 조용하지만 깊은 울림의 장소들이다.
퀴어와 페미니즘을 중심에 두는 책방들
서울 은평구의 ‘헬로인디북스’는 퀴어와 페미니즘을 책의 중심축으로 삼는 대표적인 독립 서점 중 하나다. 이곳의 책장은 단지 장르를 나열하는 방식이 아니라, 다양한 삶의 서사를 엮어내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소수자와 관련된 문학, 인문학, 시, 독립 출판물은 물론이고,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다양한 문화적 논의까지 한 공간에서 접할 수 있다. 책방지기는 매일 직접 책을 고르고, 그에 어울리는 손글씨 코멘트를 붙인다. 방문자들은 책방지기와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의 고민이나 관심사를 나누고, 때로는 그 대화가 다음 큐레이션의 단초가 되기도 한다.
‘책방무사’는 보다 뚜렷한 사회적 메시지를 담는다. 이곳에서는 페미니즘, 인권, 기후위기, 동물권과 같은 주제를 중심으로 책이 선별되며, 여성 창작자들의 감수성을 중심에 둔 LP, 아트워크, 필름카메라도 함께 진열된다. 요조라는 예술가의 개성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이 서점은 공연, 낭독회, 소규모 북토크가 자주 열리는 문화적 거점이기도 하다.
두 서점 모두, 퀴어와 페미니즘이라는 주제를 통해 사회를 다시 바라보고, 누구나 자신의 자리에서 사유할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하고 있다.
장애 감수성과 지역성의 결합
장애 관련 도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독립 서점은 아직 많지 않지만, 그중에서도 의미 있는 시도를 이어가는 곳이 있다.
대구 북성로의 ‘북성로책방’은 지역성과 장애 감수성을 함께 담은 책방이다. 이곳은 오래된 공장 건물을 개조해 만든 독특한 구조의 공간으로, 책과 함께 그 지역의 산업사와 삶의 흔적이 함께 녹아 있다. 주요 큐레이션 영역 중 하나는 정신장애, 자폐, 청각장애 등 다양한 특성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들이다. 다큐멘터리, 그림책, 만화, 학술 서적까지 포괄하는 폭넓은 구성은, 독자들로 하여금 장애라는 주제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도록 돕는다. 부산의 ‘생활 도서관 오늘의 기록’은 기록과 큐레이션을 중심으로 한 아카이브형 서점이다. 이곳은 단순한 판매 공간이 아니라, 지역의 퀴어, 장애인, 이주민 등 다양한 사회적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책과 전시, 대화 모임으로 풀어낸다. 특히 장애인의 일상을 중심으로 기획한 낭독회나 낭만사진전 같은 프로그램은, 누구나 차별 없이 문화를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 공간의 철학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이 책방들은 큐레이션의 깊이뿐 아니라, 공간과 운영 방식에서도 장애 감수성을 실천하고 있다.
책방이라는 이름의 작지만 완전한 사회
이러한 독립 서점들의 가장 큰 특징은,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인간의 조건과 가능성을 탐구한다는 점이다. 상업적 수익보다는 콘텐츠의 진정성과 사회적 메시지를 중심에 둔 큐레이션은, 독립 서점이 단순한 ‘책을 파는 장소’가 아님을 명확히 보여준다. ‘헬로 인디북스’는 성소수자 청소년이 조용히 들어와 책을 읽다 위로받고 돌아간 경험을 공개하며, 공간 자체가 하나의 돌봄이라는 철학을 공유한다. ‘책방무사’는 책을 고르기 어려운 사람을 위해 주제별 추천 리스트를 따로 정리해 두고, 페미니즘 초심자를 위한 코너도 마련해두고 있다. ‘북성로 책방’은 휠체어 접근이 가능한 통로를 따로 만들고, 청각 장애인을 위한 자막 영상을 활용한 독서회를 여는 등 물리적 접근성과 프로그램 모두에서 감수성을 실천 중이다. 이들 책방은 독립 출판이나 문학이라는 좁은 분야를 넘어서, 문화와 사람을 매개하는 열린 광장이 되고 있다. 누군가는 책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발견하고, 또 다른 이는 자신의 편견을 깨닫는다. 이러한 변화는 소리 없이, 그러나 분명히 책방이라는 공간에서 계속 자라고 있다.
다양성은 유행이 아니라 지속의 태도
퀴어, 페미니즘, 장애를 주제로 한 독립 서점은 결코 특정한 이들만의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이 책방들은 사회가 놓친 이야기, 우리가 듣지 못했던 사람들의 말, 알고 싶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던 주제들에 대한 안내서 역할을 하고 있다. 다문화 사회로 접어든 한국에서 이런 책방들은 소중한 '민감함의 훈련소'다. 독립 서점이라는 작은 공간 안에는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사회적 질문들과 해답이 숨겨져 있으며, 그 안에는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자 하는 책방지기의 마음이 담겨 있다. 이 서점들은 그저 책을 큐레이션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읽는 방법을 제안한다. 앞으로도 더 많은 독립 서점이 등장하고, 이들이 다양한 감수성과 목소리를 담아내는 그릇이 되어주기를 바란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세상을 이해하려는 끈질긴 노력이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이 모인 책방은, 우리 사회를 조금 더 너그럽고 깊이 있게 만드는 작지만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소수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소수의 것이 아닌 우리 모두의 것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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